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궁리 유적 (문단 편집) == 유적의 정체 == 왕궁리 유적은 광활한 빈 땅에 거대한 석탑이 떡하니 서 있어 예로부터 범상치 않은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다. 다만 조성 시기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며, 과연 이곳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. 1. 첫번째 설: [[고조선]]의 [[준왕]]이 [[위만]]에게 왕위를 뺏긴 뒤 남쪽으로 피신해 세운 도읍이다. 관련 유적으로는 [[미륵산성]][* 마찬가지로 준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유적으로 기준성(箕準城)이나 용화산성(龍華山城)이라고도 한다.]이 제시되었다. 1. 두번째 설: [[백제]]의 [[무왕]]이 천도 혹은 별도를 목적으로 조성한 왕궁이다. 관련 유적으로는 [[미륵사지]]와 [[쌍릉]] 등이 제시되었다. 1. 세번째 설: [[신라]]가 [[안승]]을 지원해 건국한 [[보덕국]]의 도읍이었다. 관련 유적으로는 오금산성[* 사적 제92호 익산토성]이 제시되었다. 1. 네번째 설: [[견훤]]이 [[후백제]]를 세우고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. 관련 유적은 제시되지 않았다. 발굴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궁궐이 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나왔으며, 근처의 [[미륵사]]와 [[제석사지]], 익산토성, [[미륵산성]], 낭산산성, 천호산성, 금마도토성, [[쌍릉]] 등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[[무왕(백제)|무왕]]의 [[왕궁]]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한 상태다.[* 익산 일대에 남아 있는 유적들을 통해 추정하면 익산은 [[사비성|사비]] 백제 시절 제 2의 수도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. 고려의 개경-서경, 원나라의 대도-상도의 경우처럼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수도와 이를 보조하는 부수도를 둔 것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.] 하지만 [[일본]]의 《관세음응험기(觀世音應驗記)》에는 "백제 무광왕(武廣王)이 지모밀지(枳慕密地)[* 익산의 옛 이름으로, 이를 다르게 음차한 것이 '금마저(金馬渚)'. 익산의 옛 중심지였던 '금마'면도 여기서 지명이 유래되었으며, 금마면의 소재지 이름이 동·서'''고도(古都)'''리이기도 하다.]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(帝釋精舍)라는 사찰을 세웠다"는 기록이 있는데, 무광왕이 무왕인지, 제석정사가 어떤 절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답이 없는 상태다. 인근의 다른 유적인 [[제석사지]]와의 관련성 역시 제기되고 있다. 아직 발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여러가지 수수께끼가 남아있는 곳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